[취재후] ‘집회·시위의 자유’와 코로나19…공존은 가능할까?

입력 2020.07.10 (08:46) 수정 2020.07.10 (08: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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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 장군 동상이 서 있는 서울 광화문 광장과 청계천을 따라 이어지는 청계 광장, 청와대 앞길인 효자동 삼거리와 평화의 소녀상이 세워진 옛 일본대사관 인근, 모두 서울의 대표적 명소입니다. 그런데 요즘 이 장소들의 공통점이 하나 생겼습니다. 바로 '집회·시위 금지 구역'이라는 점입니다. 이곳들뿐 아니라 서울 광장 등 서울 도심 곳곳과 인천시청 주변, 대구시와 경기 성남시 관내 모든 지역 등이 집회·시위 금지 구역으로 지정됐습니다.

최근 들어 집회·시위 금지 장소가 늘어나는 건 바로 코로나19 때문입니다. 경보 단계가 '심각' 단계를 유지하고 있는 상황에서 코로나19 확산을 막기 위해 각 지자체가 내린 조치입니다. 근거는 감염병의 예방 및 관리에 관한 법률(감염병 예방법) 49조입니다. 지자체장은 감염병 예방을 위해 여러 사람의 집합을 제한하거나 금지하는 조치 등을 할 수 있습니다. 이를 위반할 땐 주최자와 참가자에게 300만 원의 벌금이 부과됩니다.

방역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그런데 집회·시위 금지 장소가 늘어나다 보니 사회적 약자의 목소리가 묻힐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됩니다. 그들에겐 자신의 처지를 호소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수단이 집회와 시위이기 때문입니다.

28년 만에 ‘기자회견’으로 진행된 수요집회28년 만에 ‘기자회견’으로 진행된 수요집회

일본군 '성 노예제' 문제를 공론화하기 위해 시작된 '수요시위'는 28년간 옛 일본대사관 인근 평화의 소녀상 옆에서 열려 왔습니다. 그런데 어제(8일) 1,447회 만에 '시위 형식'을 포기한 채 '기자 회견'으로 진행됐습니다. 서울 종로구가 평화의 소녀상 인근을 집회·시위 금지 구역으로 설정했기 때문입니다. 참여 인원도 평소보다 줄었습니다. 연대발언에 나선 극단 고래의 이해성 대표는 "2주 전부터 극우단체가 선점하는 바람에 수요 시위 진행하지 못하고 있다"면서 "수요시위가 왜 이렇게 기자 회견 형식으로 이어나가야 하는지 마음이 참담하고 무겁습니다"고 말했습니다.

방역을 이유로 철거된 故 문중원 기수 추모 농성장방역을 이유로 철거된 故 문중원 기수 추모 농성장

이렇게 '형식'을 바꿔서 진행되는 경우도 있지만, 기회 자체를 뺏긴 이들도 있습니다. 마사회의 비리를 폭로하면서 극단적 선택을 한 고(故) 문중원 기수. 문 씨를 추모하기 위한 농성장이 서울 종로구 정부서울청사 인근에 설치됐는데 지난 2월 강제 철거됐습니다. 문 기수의 아버지인 문군옥 씨는 "저희가 갈 곳이 없습니다. 아이 시신을 여기 갖다 놓고 오도 갈 데가 없어서 여기에서 지켜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이걸 한 건데 이렇게 잔인하게도"라며 취재진에게 하소연했습니다.

아시아나 비행기의 기내 청소 등을 담당하는 ㈜아시아나케이오 코로나19로 상황이 어려워지자 노동자들을 집단 해고했습니다. 해고자들은 이에 항의하기 위해 금호아시아나그룹 종로사옥 앞에서 천막 농성장을 설치해 농성하던 중 강제 철거됐습니다. 다시 천막을 세웠다 철거되는 걸 3번이나 반복했습니다. 코로나19로 인해 일자리를 잃은 이들이 코로나19 방역을 이유로 항의할 기회조차 빼앗긴 겁니다.

방역 대책을 세우고 집회를 하는 모습(사진 출처:비정규직 이제 그만)방역 대책을 세우고 집회를 하는 모습(사진 출처:비정규직 이제 그만)

지난 5월 1일에는 시민단체 '비정규직 이제그만'이 코로나19로 인한 비정규직 노동자의 권고사직이나 무급 휴직 문제, 이주 노동자의 처우 등을 주제로 서울 시청과 광화문 광장 일대에서 집회를 진행했습니다. 담당 경찰서에 집회 신고를 할 때부터 방진복과 마스크, 손 소독제 배치, 참가자 열 체크 등 방역 조치를 하겠다고 밝혔습니다. 실제 집회에서도 신고한 대로 방역 조치를 했지만, 집회·시위 금지 구역에서 집회했단 이유로 참가자 12명은 경찰에 출석 요구를 받은 상태입니다.

“방역 수칙 지키는 안전한 집회 가능하다”고 외치는 시민단체 모습“방역 수칙 지키는 안전한 집회 가능하다”고 외치는 시민단체 모습

공공운수노조와 공권력 감시대응팀,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공익인권변론센터 등의 시민단체들은 지난 2일 서울시청 정문 앞에서 '코로나19 방역을 위한 집회 금지 규탄' 기자회견을 열었습니다. 이들은 "절박한 상황에서 권리를 이야기하는 목소리가 무분별한 집회 금지로 인해 전달되지 못하고 있다"면서 "서로의 안전을 지키면서 모이고 외칠 권리는 누리는 것은 충분히 가능하다"고 강조했습니다.

지난 7일에는 청년 시민단체인 '청년 사회주의자 모임'도 기자회견을 열어 "정부 당국이 코로나 19 방역을 이유로 서울 도심의 모든 집회와 시위를 금지한 조치는 부당하다"며 "대중교통이나 물류센터에서 밀집해서 일하는 건 괜찮고 집회·시위는 안 된다는 정부 당국의 조치는 어떠한 정당성과 명분이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광화문 광장에 설치된 집회 금지 표시판광화문 광장에 설치된 집회 금지 표시판

그렇다면 집회·시위와 방역은 공존할 수 없는 걸까요. 국내외 보건 전문가들은 충분히 공존 가능하다고 이야기합니다. 김우주 고려대 구로병원 교수는 "사회적 거리 두기 1단계이기 때문에 실내에서도 여러 회의가 수칙을 지킨 상태에서 잘 이뤄지고 있다"면서 "실외 집회에서도 세부지침을 정부가 마련해 마스크 착용, 손 세정제 사용, 체온 측정, 1~2m 거리 두기를 잘 실천하면 실외에서도 안전하게 집회를 할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세계보건기구 사무총장 역시 최근 미국의 인종차별 반대 집회의 취지에 공감하며 집회가 안전하게 이루어질 것을 장려한다는 뜻을 밝혔습니다. 또 미국 공중보건 전문가 1,288명은 집회와 시위의 자유를 지지하는 내용의 공개서한을 발표하며 "코로나 19 방역을 이유로 집회를 해산시켜서는 안 된다"고 요구했습니다. 프랑스의 경우 최고행정법원이 방역 수칙을 지키는 집회는 개최될 수 있어야 하며, 코로나 19 방역을 이유로 집회를 금지해서는 안 된다는 판결을 내리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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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0-07-10 08:46:24
    • 수정2020-07-10 08:46:39
    취재후·사건후
이순신 장군 동상이 서 있는 서울 광화문 광장과 청계천을 따라 이어지는 청계 광장, 청와대 앞길인 효자동 삼거리와 평화의 소녀상이 세워진 옛 일본대사관 인근, 모두 서울의 대표적 명소입니다. 그런데 요즘 이 장소들의 공통점이 하나 생겼습니다. 바로 '집회·시위 금지 구역'이라는 점입니다. 이곳들뿐 아니라 서울 광장 등 서울 도심 곳곳과 인천시청 주변, 대구시와 경기 성남시 관내 모든 지역 등이 집회·시위 금지 구역으로 지정됐습니다.

최근 들어 집회·시위 금지 장소가 늘어나는 건 바로 코로나19 때문입니다. 경보 단계가 '심각' 단계를 유지하고 있는 상황에서 코로나19 확산을 막기 위해 각 지자체가 내린 조치입니다. 근거는 감염병의 예방 및 관리에 관한 법률(감염병 예방법) 49조입니다. 지자체장은 감염병 예방을 위해 여러 사람의 집합을 제한하거나 금지하는 조치 등을 할 수 있습니다. 이를 위반할 땐 주최자와 참가자에게 300만 원의 벌금이 부과됩니다.

방역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그런데 집회·시위 금지 장소가 늘어나다 보니 사회적 약자의 목소리가 묻힐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됩니다. 그들에겐 자신의 처지를 호소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수단이 집회와 시위이기 때문입니다.

28년 만에 ‘기자회견’으로 진행된 수요집회
일본군 '성 노예제' 문제를 공론화하기 위해 시작된 '수요시위'는 28년간 옛 일본대사관 인근 평화의 소녀상 옆에서 열려 왔습니다. 그런데 어제(8일) 1,447회 만에 '시위 형식'을 포기한 채 '기자 회견'으로 진행됐습니다. 서울 종로구가 평화의 소녀상 인근을 집회·시위 금지 구역으로 설정했기 때문입니다. 참여 인원도 평소보다 줄었습니다. 연대발언에 나선 극단 고래의 이해성 대표는 "2주 전부터 극우단체가 선점하는 바람에 수요 시위 진행하지 못하고 있다"면서 "수요시위가 왜 이렇게 기자 회견 형식으로 이어나가야 하는지 마음이 참담하고 무겁습니다"고 말했습니다.

방역을 이유로 철거된 故 문중원 기수 추모 농성장
이렇게 '형식'을 바꿔서 진행되는 경우도 있지만, 기회 자체를 뺏긴 이들도 있습니다. 마사회의 비리를 폭로하면서 극단적 선택을 한 고(故) 문중원 기수. 문 씨를 추모하기 위한 농성장이 서울 종로구 정부서울청사 인근에 설치됐는데 지난 2월 강제 철거됐습니다. 문 기수의 아버지인 문군옥 씨는 "저희가 갈 곳이 없습니다. 아이 시신을 여기 갖다 놓고 오도 갈 데가 없어서 여기에서 지켜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이걸 한 건데 이렇게 잔인하게도"라며 취재진에게 하소연했습니다.

아시아나 비행기의 기내 청소 등을 담당하는 ㈜아시아나케이오 코로나19로 상황이 어려워지자 노동자들을 집단 해고했습니다. 해고자들은 이에 항의하기 위해 금호아시아나그룹 종로사옥 앞에서 천막 농성장을 설치해 농성하던 중 강제 철거됐습니다. 다시 천막을 세웠다 철거되는 걸 3번이나 반복했습니다. 코로나19로 인해 일자리를 잃은 이들이 코로나19 방역을 이유로 항의할 기회조차 빼앗긴 겁니다.

방역 대책을 세우고 집회를 하는 모습(사진 출처:비정규직 이제 그만)
지난 5월 1일에는 시민단체 '비정규직 이제그만'이 코로나19로 인한 비정규직 노동자의 권고사직이나 무급 휴직 문제, 이주 노동자의 처우 등을 주제로 서울 시청과 광화문 광장 일대에서 집회를 진행했습니다. 담당 경찰서에 집회 신고를 할 때부터 방진복과 마스크, 손 소독제 배치, 참가자 열 체크 등 방역 조치를 하겠다고 밝혔습니다. 실제 집회에서도 신고한 대로 방역 조치를 했지만, 집회·시위 금지 구역에서 집회했단 이유로 참가자 12명은 경찰에 출석 요구를 받은 상태입니다.

“방역 수칙 지키는 안전한 집회 가능하다”고 외치는 시민단체 모습
공공운수노조와 공권력 감시대응팀,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공익인권변론센터 등의 시민단체들은 지난 2일 서울시청 정문 앞에서 '코로나19 방역을 위한 집회 금지 규탄' 기자회견을 열었습니다. 이들은 "절박한 상황에서 권리를 이야기하는 목소리가 무분별한 집회 금지로 인해 전달되지 못하고 있다"면서 "서로의 안전을 지키면서 모이고 외칠 권리는 누리는 것은 충분히 가능하다"고 강조했습니다.

지난 7일에는 청년 시민단체인 '청년 사회주의자 모임'도 기자회견을 열어 "정부 당국이 코로나 19 방역을 이유로 서울 도심의 모든 집회와 시위를 금지한 조치는 부당하다"며 "대중교통이나 물류센터에서 밀집해서 일하는 건 괜찮고 집회·시위는 안 된다는 정부 당국의 조치는 어떠한 정당성과 명분이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광화문 광장에 설치된 집회 금지 표시판
그렇다면 집회·시위와 방역은 공존할 수 없는 걸까요. 국내외 보건 전문가들은 충분히 공존 가능하다고 이야기합니다. 김우주 고려대 구로병원 교수는 "사회적 거리 두기 1단계이기 때문에 실내에서도 여러 회의가 수칙을 지킨 상태에서 잘 이뤄지고 있다"면서 "실외 집회에서도 세부지침을 정부가 마련해 마스크 착용, 손 세정제 사용, 체온 측정, 1~2m 거리 두기를 잘 실천하면 실외에서도 안전하게 집회를 할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세계보건기구 사무총장 역시 최근 미국의 인종차별 반대 집회의 취지에 공감하며 집회가 안전하게 이루어질 것을 장려한다는 뜻을 밝혔습니다. 또 미국 공중보건 전문가 1,288명은 집회와 시위의 자유를 지지하는 내용의 공개서한을 발표하며 "코로나 19 방역을 이유로 집회를 해산시켜서는 안 된다"고 요구했습니다. 프랑스의 경우 최고행정법원이 방역 수칙을 지키는 집회는 개최될 수 있어야 하며, 코로나 19 방역을 이유로 집회를 금지해서는 안 된다는 판결을 내리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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