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가를 돈 주고 사는 사람들’

입력 2019.08.20 (16: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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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가. 직장인들에게는 설레는 단어입니다. 고된 노동에서 벗어나 달콤한 휴식을 취하며 재충전을 할 수 있는 시간입니다. 5인 이상의 사업장에서 일주일 동안 15시간 일하는 노동자라면 누구나 휴가를 누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일부 노동자들은 휴가를 '사야' 합니다. 어떤 말이냐고요? 휴가를 가기 위해 자신의 돈을 주고 대체근무자를 구하고 있는 겁니다. 주로 맞교대 근무를 하거나, 매일 정해진 일정한 양을 일해야 하는 노동자들이 이런 상황에 처해 있습니다. 예를 들자면 아파트 경비원이나 요양보호사, 소규모 기관의 조리원, 택배노동자 등입니다.

■ 맞교대 근무에 휴가 눈치 보여....경비원 절반 "일당 주고 대체근무자 구해"

광주광역시 한 아파트에서 일하는 경비원 A씨는 여름 휴가를 가기 위해 경비원 경력이 있는 지인에게 근무를 부탁했습니다. 대가로 건넨 돈은 일당 12만 원…. 요즘같은 휴가철엔 대체근무자가 귀하다 보니 웃돈을 줘도 구하기 어려울 정도입니다.

2백만 원이 안되는 월급에서 12만원 은 적은 돈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함께 일하는 동료에게 근무를 부탁하는 이른바 '품앗이 근무'도 쉽지 않습니다. 대다수 경비원들은 24시간 맞교대 근무를 하고 있는데, 품앗이 근무를 맡길 경우 동료가 연속 3일, 72시간 근무를 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 때문에 용역업체나 입주자 대표회의에서도 사실상 경비원 스스로 대체근무자를 찾아올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실제 광주비정규직지원센터가 광주지역 경비원 300여 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절반이 넘는 55%가 휴가를 갈 경우 일당을 주고 대체근무자를 구한다고 답했습니다.


광주비정규직지원센터 정찬호 센터장은 "야간 근무 등 근무 시간에 대한 부담, 이런 것들이 좀 높아지기 때문에 내가 다른 사람으로 대타(대체근무)를 불러넣어서 하게 하는 경향이 높다"고 설명했습니다.

■"우리는 하루살이"...재가요양보호사·독거노인 생활관리사

정부 보조나 위탁사업이라고 해서 다르지 않습니다. 시설에 들어가지 못한 어르신들의 집에 찾아가 식사와 청소를 돕고, 말벗도 해주는 재가요양보호사들. 노인장기요양보험 재원으로 인건비를 지원하고 있는데요, 시간당 수당은 최저임금 수준에 불과해 교통비라도 아껴보려 하루에 두 세집을 걸어서 이동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매일 어르신들을 살펴야 하는 업무 특성상, 대체 근무자가 없으면 휴가도 가기 힘들기 때문에 급한 경우엔 일당을 주고 사람을 구하기도 합니다. 그마저도 혹시나 수급자가 대체근무자를 더 마음에 들어해 내 일자리를 뺏길 수 있다는 걱정에 쉬는 날에도 마음이 편치 않습니다.


전화나 방문을 통해 홀몸노인들의 건강상태를 확인하는 독거노인 생활관리사들의 처지도 비슷했습니다. 심지어 광주광역시의 한 독거노인 생활관리사 B씨는 휴가를 다녀왔다가 일자리를 잃기도 했습니다. 대체근무자를 지정해놓지 않고 휴가를 갔고 이에 대한 시말서를 거부했다는 이유로 사업을 담당하는 시설에서 해고한 겁니다. 휴가를 가기 2주일 전부터 회사에 알렸고, 대체근무자 지정을 요구했던 B 씨로서는 황당한 일입니다. 결국 노동위가 지나친 징계라고 판단해 현재는 업무에 복귀한 상태지만 재심이 진행되고 있어서 불안한 나날을 보내고 있습니다.

■업체 지휘받는 개인사업자...특수고용노동자 '택배기사'

특수고용노동자라는 위치에 있는 택배기사들도 휴가 가기가 어려운 건 마찬가집니다. 사실상 업체의 지휘를 받고 일하는데 개인사업자로 분류돼 근로기준법상 노동자 권리도 인정받기 어렵습니다. 취재진이 만난 한 택배기사는 일을 시작한 이후 12년 동안 휴가를 다녀온 게 7차례에 그쳤습니다.


휴가를 갈 때도 만만찮은 손실을 감수해야 합니다. 매일 쏟아지는 자신의 택배 물량을 퀵이나 콜벤 등 다른 업체에게 더 높은 수수료를 지불하고 배달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요즘은 수수료도 올라 최근엔 건당 3천 원까지 요구하기도 합니다. 만약 하루 배달할 물량이 200개 였다면 택배 하나당 3천 원 씩 모두 60만 원을 줘야 합니다. 말 그대로 하루 '60만 원짜리 휴가' 를 사는 셈입니다.

■'돈 주고 사는 휴가'의 이면엔 고용 불안의 그늘

노동자가 휴가를 갔을 경우에 경영을 하는 주체인 사업자가 인사관리를 통해 업무 공백을 메워야 하는데 왜 이런 일들이 생기는 걸까요? 이면에는 '고용 불안' 이 숨어있습니다. 광주지역 경비원들의 경우 설문조사 결과, 4명 가운데 3명 꼴로 간접고용이고, 계약기간도 1년이 62%, 3개월이나 6개월 등 단기계약도 31%나 됐습니다.

요양보호사나 독거노인생활관리사도 일하는 시간에 따라 일당을 받는 1년 계약직이 대부분입니다. 당장 내일이라도 해고 위험이 있는 상황에서 휴가를 요구하기가 어렵습니다. 이 때문에 "사람이 없으니 휴가를 가려면 알아서 하라"는 사업주의 말은 일당을 줘서라도 대체근무자를 구하든가, 휴가를 포기하게 만드는 주문으로 들립니다.

■휴가 떠날 권리 보장 방법은?

광주광역시 한 입주자대표회의는 2004년부터 경비원들에게 휴가비를 지급하고 있습니다. 입주민들이 낸 관리비로 경비원들의 처우를 개선하고 있는 겁니다. 대체근무자도 관리소 측에서 지정합니다. 휴가를 다녀온 경비원들의 만족도도 큽니다.

하지만 이런 선의에만 기대기에는 부족합니다. 제도 개선이 필요하다는 지적입니다. 전문가들은 재가요양보호사들 같은 공공영역 사업의 경우 임금과 별도로 간접 인건비를 책정해 연차 등에 대비한 대체근무자를 확보해야 한다고 조언합니다. 또 쉴 권리를 보장하지 않는 사업장에 대한 근로감독 강화를 요구하는 목소리도 높습니다. 무엇보다 이렇게 '돈 주고 휴가를 가는' 노동자들의 규모가 얼마나 되는 지, 어떤 직종인 지 등을 파악할 수 있도록 정확한 실태 조사도 요구됩니다.

[연관기사] 일당주고 떠나는 노동자들 “휴가도 돈 내고 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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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휴가를 돈 주고 사는 사람들’
    • 입력 2019-08-20 16:52:04
    취재K
휴가. 직장인들에게는 설레는 단어입니다. 고된 노동에서 벗어나 달콤한 휴식을 취하며 재충전을 할 수 있는 시간입니다. 5인 이상의 사업장에서 일주일 동안 15시간 일하는 노동자라면 누구나 휴가를 누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일부 노동자들은 휴가를 '사야' 합니다. 어떤 말이냐고요? 휴가를 가기 위해 자신의 돈을 주고 대체근무자를 구하고 있는 겁니다. 주로 맞교대 근무를 하거나, 매일 정해진 일정한 양을 일해야 하는 노동자들이 이런 상황에 처해 있습니다. 예를 들자면 아파트 경비원이나 요양보호사, 소규모 기관의 조리원, 택배노동자 등입니다.

■ 맞교대 근무에 휴가 눈치 보여....경비원 절반 "일당 주고 대체근무자 구해"

광주광역시 한 아파트에서 일하는 경비원 A씨는 여름 휴가를 가기 위해 경비원 경력이 있는 지인에게 근무를 부탁했습니다. 대가로 건넨 돈은 일당 12만 원…. 요즘같은 휴가철엔 대체근무자가 귀하다 보니 웃돈을 줘도 구하기 어려울 정도입니다.

2백만 원이 안되는 월급에서 12만원 은 적은 돈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함께 일하는 동료에게 근무를 부탁하는 이른바 '품앗이 근무'도 쉽지 않습니다. 대다수 경비원들은 24시간 맞교대 근무를 하고 있는데, 품앗이 근무를 맡길 경우 동료가 연속 3일, 72시간 근무를 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 때문에 용역업체나 입주자 대표회의에서도 사실상 경비원 스스로 대체근무자를 찾아올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실제 광주비정규직지원센터가 광주지역 경비원 300여 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절반이 넘는 55%가 휴가를 갈 경우 일당을 주고 대체근무자를 구한다고 답했습니다.


광주비정규직지원센터 정찬호 센터장은 "야간 근무 등 근무 시간에 대한 부담, 이런 것들이 좀 높아지기 때문에 내가 다른 사람으로 대타(대체근무)를 불러넣어서 하게 하는 경향이 높다"고 설명했습니다.

■"우리는 하루살이"...재가요양보호사·독거노인 생활관리사

정부 보조나 위탁사업이라고 해서 다르지 않습니다. 시설에 들어가지 못한 어르신들의 집에 찾아가 식사와 청소를 돕고, 말벗도 해주는 재가요양보호사들. 노인장기요양보험 재원으로 인건비를 지원하고 있는데요, 시간당 수당은 최저임금 수준에 불과해 교통비라도 아껴보려 하루에 두 세집을 걸어서 이동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매일 어르신들을 살펴야 하는 업무 특성상, 대체 근무자가 없으면 휴가도 가기 힘들기 때문에 급한 경우엔 일당을 주고 사람을 구하기도 합니다. 그마저도 혹시나 수급자가 대체근무자를 더 마음에 들어해 내 일자리를 뺏길 수 있다는 걱정에 쉬는 날에도 마음이 편치 않습니다.


전화나 방문을 통해 홀몸노인들의 건강상태를 확인하는 독거노인 생활관리사들의 처지도 비슷했습니다. 심지어 광주광역시의 한 독거노인 생활관리사 B씨는 휴가를 다녀왔다가 일자리를 잃기도 했습니다. 대체근무자를 지정해놓지 않고 휴가를 갔고 이에 대한 시말서를 거부했다는 이유로 사업을 담당하는 시설에서 해고한 겁니다. 휴가를 가기 2주일 전부터 회사에 알렸고, 대체근무자 지정을 요구했던 B 씨로서는 황당한 일입니다. 결국 노동위가 지나친 징계라고 판단해 현재는 업무에 복귀한 상태지만 재심이 진행되고 있어서 불안한 나날을 보내고 있습니다.

■업체 지휘받는 개인사업자...특수고용노동자 '택배기사'

특수고용노동자라는 위치에 있는 택배기사들도 휴가 가기가 어려운 건 마찬가집니다. 사실상 업체의 지휘를 받고 일하는데 개인사업자로 분류돼 근로기준법상 노동자 권리도 인정받기 어렵습니다. 취재진이 만난 한 택배기사는 일을 시작한 이후 12년 동안 휴가를 다녀온 게 7차례에 그쳤습니다.


휴가를 갈 때도 만만찮은 손실을 감수해야 합니다. 매일 쏟아지는 자신의 택배 물량을 퀵이나 콜벤 등 다른 업체에게 더 높은 수수료를 지불하고 배달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요즘은 수수료도 올라 최근엔 건당 3천 원까지 요구하기도 합니다. 만약 하루 배달할 물량이 200개 였다면 택배 하나당 3천 원 씩 모두 60만 원을 줘야 합니다. 말 그대로 하루 '60만 원짜리 휴가' 를 사는 셈입니다.

■'돈 주고 사는 휴가'의 이면엔 고용 불안의 그늘

노동자가 휴가를 갔을 경우에 경영을 하는 주체인 사업자가 인사관리를 통해 업무 공백을 메워야 하는데 왜 이런 일들이 생기는 걸까요? 이면에는 '고용 불안' 이 숨어있습니다. 광주지역 경비원들의 경우 설문조사 결과, 4명 가운데 3명 꼴로 간접고용이고, 계약기간도 1년이 62%, 3개월이나 6개월 등 단기계약도 31%나 됐습니다.

요양보호사나 독거노인생활관리사도 일하는 시간에 따라 일당을 받는 1년 계약직이 대부분입니다. 당장 내일이라도 해고 위험이 있는 상황에서 휴가를 요구하기가 어렵습니다. 이 때문에 "사람이 없으니 휴가를 가려면 알아서 하라"는 사업주의 말은 일당을 줘서라도 대체근무자를 구하든가, 휴가를 포기하게 만드는 주문으로 들립니다.

■휴가 떠날 권리 보장 방법은?

광주광역시 한 입주자대표회의는 2004년부터 경비원들에게 휴가비를 지급하고 있습니다. 입주민들이 낸 관리비로 경비원들의 처우를 개선하고 있는 겁니다. 대체근무자도 관리소 측에서 지정합니다. 휴가를 다녀온 경비원들의 만족도도 큽니다.

하지만 이런 선의에만 기대기에는 부족합니다. 제도 개선이 필요하다는 지적입니다. 전문가들은 재가요양보호사들 같은 공공영역 사업의 경우 임금과 별도로 간접 인건비를 책정해 연차 등에 대비한 대체근무자를 확보해야 한다고 조언합니다. 또 쉴 권리를 보장하지 않는 사업장에 대한 근로감독 강화를 요구하는 목소리도 높습니다. 무엇보다 이렇게 '돈 주고 휴가를 가는' 노동자들의 규모가 얼마나 되는 지, 어떤 직종인 지 등을 파악할 수 있도록 정확한 실태 조사도 요구됩니다.

[연관기사] 일당주고 떠나는 노동자들 “휴가도 돈 내고 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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