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벨 누르기가 두렵습니다”

입력 2019.06.27 (17: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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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례 #1. 도시가스 안전점검원 A 씨.
"지난해 4월 울산의 한 원룸에 안전점검을 갔다가 50대 남성이 저를 감금하고 성추행을 시도했어요. 열흘 넘게 혼자 끙끙 앓다가 회사에 알렸지만, 며칠 만에 업무에 복귀시켰죠. 그러다 팬티만 입고 문을 열어주는 남성을 보고 소스라치게 놀랐어요. 트라우마로 힘들어하다 결국 극단적인 선택까지 시도했어요. 직장 동료들이 저를 발견해 겨우 목숨을 건지고 심리상담 치료를 받고 있지만, 당시 받았던 충격이 쉽게 사라지진 않아요."

사례 #2. 재가요양보호사 B 씨.
"지난해 6월 구로구 오류동에 있는 80대 노인의 집에 갔어요. 경증 치매 환자라고는 했는데, 그렇게 보기 어려울 정도로 계획적이고 치밀하게 성희롱을 했어요. 헐렁한 트렁크 속옷만 입고 다리를 주무르라고 하질 않나, 심지어 특정 부위를 만져달라고까지…. 거부하니까 휴대폰으로 야한 사진이나 포르노 영상을 보여주더군요. 청와대 청원까지 넣었지만 달라지는 건 없었어요. 결국, 직장을 그만뒀습니다."

사례 #3. 다문화가정 방문교육지도사 C 씨.
"한국인과 결혼한 베트남 여성이 제 학생이었는데, 몸에 상처가 많고 남편으로부터 학대를 당하고 있더군요. 수업을 진행하면서 대화도 많이 하고 용기를 북돋아 주었는데, 남편과 시어머니가 "며느리 버려놨다"면서 저를 협박하더라고요. 남편은 자신이 사람 여럿 죽여본 특전사 출신이라며 살해 협박까지 했습니다. 위협을 느꼈지만, 센터에서는 가족들로부터 절대 민원이 들어오면 안 된다고 해서 아무 말도 못 했습니다."

사측의 안전 대책을 요구하며 농성 중인 울산 경동도시가스 소속 여성 점검원들. 사측의 안전 대책을 요구하며 농성 중인 울산 경동도시가스 소속 여성 점검원들.

■ "가구 방문 정신보건전문요원의 14%가 성적 위협받아"

고객의 집에 직접 찾아가 일을 하는 노동자들이 겪은 성희롱과 폭력 사례들입니다. 도시가스 안전점검원을 비롯해 수도검침원, 국민연금 방문상담원 같은 직업들인데요. 대다수가 여성입니다. 집이라는 밀폐된 공간에서 혼자 일을 해야 하는 업무 특성상 성희롱과 폭력 위험에 쉽게 노출돼 있습니다.

2016년 국립정신보건센터의 정신보건전문요원 실태조사에 따르면, 대상자 가구에 방문해서 일하는 정신보건전문요원의 80.4%는 안전위협을 겪고 있었고, 그중 14%는 성적인 위협까지 겪고 있었습니다.

오늘(27일) 국회에서 열린 ‘가구 방문 노동자의 뼈 때리는 인권침해 증언대회’오늘(27일) 국회에서 열린 ‘가구 방문 노동자의 뼈 때리는 인권침해 증언대회’

■ "회사에 얘기했더니 호루라기 하나 주고 말더라"

국회에선 오늘(27일) 오후 정의당 윤소하 원내대표 주관으로 '가구 방문 노동자의 뼈 때리는 인권침해 증언대회'가 열렸습니다.

울산 경동도시가스에서 근무하고 있는 김정희 씨는 "안전점검을 하러 나가보면, '왜 이렇게 요금이 많이 나오냐'고 소리를 높이면서 점검원을 아랫사람 다루듯 대하는 사람들이 많다"고 전했습니다. 그러면서 "회사에 아무리 이야기를 해봐도 호루라기를 하나씩 나눠줬을 뿐 별다른 대책은 없었다"고 말했습니다. 울산 경동도시가스의 여성 검침원 10여 명은 앞서 소개된 동료 A 씨의 사례를 겪은 뒤 사 측의 성폭력 방지 대책을 요구하며 한 달 넘게 농성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도시가스 안전점검원 분들만이 아닙니다. 강릉시에서 수도 검침원으로 일하는 최숙자 씨는 "시장 좁은 골목에서 허리를 구부려 검침하다 보면 누군가 엉덩이를 만지고 도망가는 경우도 많다"고 호소했습니다. 최 씨는 또 "강릉시는 기초수급자들의 수도세 체납이 3개월만 되어도 단수 조치할 것을 강요하고 있는데, 이런 경우 칼이나 망치를 든 수급자들로부터 협박을 당하기도 한다"고 덧붙였습니다.

요양보호사로 일하는 이건복 씨는 "돌봄 노동은 전통적인 여성들의 몫이라는 인식 속에서, 성차별적인 무시와 천대가 공공연히 일어나고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이 씨는 "특히 재가요양서비스는 길게는 4시간 동안 이용자와 단둘이 있어야 하는데, 성폭력에 노출될 위험성이 크다"고 강조했습니다.

다문화 방문지도사 구은선 씨는 "지도사를 고용하는 센터는 정기적으로 고객 만족도 평가를 받아 재위탁 여부가 결정되는데, 그래서 평가에만 목을 매 지도사의 근무 환경에는 관심이 없다"고 호소했습니다.

■ "2인 1조 배치 필요"…민간 위탁 구조도 개선해야

대안은 뭘까요. 방문직 노동자들은 현장의 '2인 1조 배치'를 공통적으로 이야기합니다. 가구 방문 노동은 1인 노동이기에, 발생하는 각종 위험에 대처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2016년 구의역 스크린도어 사고가 발생한 뒤 작업장의 2인 1조 근무 의무화가 도입된 배경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사 측은 비용 문제와 근무 효율성을 주장하며 '2인 1조 배치'가 어렵다고 맞서고 있습니다.

증언대회에 참석한 조이현주 변호사는 "산업안전보건법 5조는 근로자의 신체적 피로와 정신적 스트레스 등을 줄이도록 사업주가 작업 환경을 조성할 것을 의무화하지만, 업무별로 구체화한 세부 법령이 없어 실제로 지켜지는 경우는 거의 없다"고 지적했습니다. 또 "민간 위탁과 외주화로 사용자가 노동자의 위험을 책임지지 않는 구조도 문제"라고 덧붙였습니다.

국가인권위원회 노영희 사무관은 "여태껏 가구 방문 노동자에 대한 인권 침해 사례를 조사한 적은 없었다"면서 "실태 조사를 실시해 관련 정책과 대응 방안을 마련할 수 있도록 하겠다"고 말했습니다.

정의당 윤소하 원내대표는 "2인 1조 근무는 서비스의 질을 비약적으로 높일 수 있기 때문에 회사 손실이라고만은 볼 수 없다"면서 "결국 사람과 예산의 문제이고, 노동자 안전을 위한 법·제도를 살펴 개선에 힘쓰도록 하겠다"고 말했습니다.

도시가스 안전점검원, 요양보호사들은 '방문직 노동자'라는 딱딱한 이름으로 불리기 이전에 누군가의 아내이고, 엄마이고 누이일 겁니다. 안전하게 일할 권리를 보장하겠다는 정치권이 방문직 노동자들의 눈물을 닦아 주는 길을 만들어주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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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9-06-27 17:48:24
    취재K
사례 #1. 도시가스 안전점검원 A 씨.
"지난해 4월 울산의 한 원룸에 안전점검을 갔다가 50대 남성이 저를 감금하고 성추행을 시도했어요. 열흘 넘게 혼자 끙끙 앓다가 회사에 알렸지만, 며칠 만에 업무에 복귀시켰죠. 그러다 팬티만 입고 문을 열어주는 남성을 보고 소스라치게 놀랐어요. 트라우마로 힘들어하다 결국 극단적인 선택까지 시도했어요. 직장 동료들이 저를 발견해 겨우 목숨을 건지고 심리상담 치료를 받고 있지만, 당시 받았던 충격이 쉽게 사라지진 않아요."

사례 #2. 재가요양보호사 B 씨.
"지난해 6월 구로구 오류동에 있는 80대 노인의 집에 갔어요. 경증 치매 환자라고는 했는데, 그렇게 보기 어려울 정도로 계획적이고 치밀하게 성희롱을 했어요. 헐렁한 트렁크 속옷만 입고 다리를 주무르라고 하질 않나, 심지어 특정 부위를 만져달라고까지…. 거부하니까 휴대폰으로 야한 사진이나 포르노 영상을 보여주더군요. 청와대 청원까지 넣었지만 달라지는 건 없었어요. 결국, 직장을 그만뒀습니다."

사례 #3. 다문화가정 방문교육지도사 C 씨.
"한국인과 결혼한 베트남 여성이 제 학생이었는데, 몸에 상처가 많고 남편으로부터 학대를 당하고 있더군요. 수업을 진행하면서 대화도 많이 하고 용기를 북돋아 주었는데, 남편과 시어머니가 "며느리 버려놨다"면서 저를 협박하더라고요. 남편은 자신이 사람 여럿 죽여본 특전사 출신이라며 살해 협박까지 했습니다. 위협을 느꼈지만, 센터에서는 가족들로부터 절대 민원이 들어오면 안 된다고 해서 아무 말도 못 했습니다."

사측의 안전 대책을 요구하며 농성 중인 울산 경동도시가스 소속 여성 점검원들.
■ "가구 방문 정신보건전문요원의 14%가 성적 위협받아"

고객의 집에 직접 찾아가 일을 하는 노동자들이 겪은 성희롱과 폭력 사례들입니다. 도시가스 안전점검원을 비롯해 수도검침원, 국민연금 방문상담원 같은 직업들인데요. 대다수가 여성입니다. 집이라는 밀폐된 공간에서 혼자 일을 해야 하는 업무 특성상 성희롱과 폭력 위험에 쉽게 노출돼 있습니다.

2016년 국립정신보건센터의 정신보건전문요원 실태조사에 따르면, 대상자 가구에 방문해서 일하는 정신보건전문요원의 80.4%는 안전위협을 겪고 있었고, 그중 14%는 성적인 위협까지 겪고 있었습니다.

오늘(27일) 국회에서 열린 ‘가구 방문 노동자의 뼈 때리는 인권침해 증언대회’
■ "회사에 얘기했더니 호루라기 하나 주고 말더라"

국회에선 오늘(27일) 오후 정의당 윤소하 원내대표 주관으로 '가구 방문 노동자의 뼈 때리는 인권침해 증언대회'가 열렸습니다.

울산 경동도시가스에서 근무하고 있는 김정희 씨는 "안전점검을 하러 나가보면, '왜 이렇게 요금이 많이 나오냐'고 소리를 높이면서 점검원을 아랫사람 다루듯 대하는 사람들이 많다"고 전했습니다. 그러면서 "회사에 아무리 이야기를 해봐도 호루라기를 하나씩 나눠줬을 뿐 별다른 대책은 없었다"고 말했습니다. 울산 경동도시가스의 여성 검침원 10여 명은 앞서 소개된 동료 A 씨의 사례를 겪은 뒤 사 측의 성폭력 방지 대책을 요구하며 한 달 넘게 농성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도시가스 안전점검원 분들만이 아닙니다. 강릉시에서 수도 검침원으로 일하는 최숙자 씨는 "시장 좁은 골목에서 허리를 구부려 검침하다 보면 누군가 엉덩이를 만지고 도망가는 경우도 많다"고 호소했습니다. 최 씨는 또 "강릉시는 기초수급자들의 수도세 체납이 3개월만 되어도 단수 조치할 것을 강요하고 있는데, 이런 경우 칼이나 망치를 든 수급자들로부터 협박을 당하기도 한다"고 덧붙였습니다.

요양보호사로 일하는 이건복 씨는 "돌봄 노동은 전통적인 여성들의 몫이라는 인식 속에서, 성차별적인 무시와 천대가 공공연히 일어나고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이 씨는 "특히 재가요양서비스는 길게는 4시간 동안 이용자와 단둘이 있어야 하는데, 성폭력에 노출될 위험성이 크다"고 강조했습니다.

다문화 방문지도사 구은선 씨는 "지도사를 고용하는 센터는 정기적으로 고객 만족도 평가를 받아 재위탁 여부가 결정되는데, 그래서 평가에만 목을 매 지도사의 근무 환경에는 관심이 없다"고 호소했습니다.

■ "2인 1조 배치 필요"…민간 위탁 구조도 개선해야

대안은 뭘까요. 방문직 노동자들은 현장의 '2인 1조 배치'를 공통적으로 이야기합니다. 가구 방문 노동은 1인 노동이기에, 발생하는 각종 위험에 대처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2016년 구의역 스크린도어 사고가 발생한 뒤 작업장의 2인 1조 근무 의무화가 도입된 배경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사 측은 비용 문제와 근무 효율성을 주장하며 '2인 1조 배치'가 어렵다고 맞서고 있습니다.

증언대회에 참석한 조이현주 변호사는 "산업안전보건법 5조는 근로자의 신체적 피로와 정신적 스트레스 등을 줄이도록 사업주가 작업 환경을 조성할 것을 의무화하지만, 업무별로 구체화한 세부 법령이 없어 실제로 지켜지는 경우는 거의 없다"고 지적했습니다. 또 "민간 위탁과 외주화로 사용자가 노동자의 위험을 책임지지 않는 구조도 문제"라고 덧붙였습니다.

국가인권위원회 노영희 사무관은 "여태껏 가구 방문 노동자에 대한 인권 침해 사례를 조사한 적은 없었다"면서 "실태 조사를 실시해 관련 정책과 대응 방안을 마련할 수 있도록 하겠다"고 말했습니다.

정의당 윤소하 원내대표는 "2인 1조 근무는 서비스의 질을 비약적으로 높일 수 있기 때문에 회사 손실이라고만은 볼 수 없다"면서 "결국 사람과 예산의 문제이고, 노동자 안전을 위한 법·제도를 살펴 개선에 힘쓰도록 하겠다"고 말했습니다.

도시가스 안전점검원, 요양보호사들은 '방문직 노동자'라는 딱딱한 이름으로 불리기 이전에 누군가의 아내이고, 엄마이고 누이일 겁니다. 안전하게 일할 권리를 보장하겠다는 정치권이 방문직 노동자들의 눈물을 닦아 주는 길을 만들어주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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