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화·살인 현장의 ‘의인’…“꿈 잃었는데 직장까지”

입력 2019.06.27 (15: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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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재경보음을 듣고 관리사무소 사무실을 나가고 있는 정연섭 씨

# 방화·살인 참사...현장지킨 관리사무소 막내 직원
지난 4월 17일 방화·살인 참사가 일어난 진주의 한 아파트 관리사무소.
당직 근무를 하던 관리사무소 막내 직원 29살 정연섭 씨는 새벽 4시가 지날 무렵 화재경보음을 듣습니다. 당직 매뉴얼에 따라 각 동 경비원들에게 위급상황을 알리는 무전을 보낸 뒤 불이 난 현장으로 부리나케 달려갔습니다.

아파트로 들어간 정 씨는 엘리베이터가 1층에 없자 계단을 통해 불이 난 4층으로 뛰어 올라갔습니다. 화재 현장을 확인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매뉴얼대로 4층 아파트 가스 밸브가 잠긴 걸 확인하곤 119와 112에 신고한 뒤 동료 근무자에게 비상연락을 돌렸습니다. 그 순간 갑자기 “딸이 찔렸다”라는 고함 소리를 들었습니다. 소리가 난 3층과 4층 사이의 계단으로 가자 한 남성이 양손에 흉기를 든 채 서 있었습니다. 방화·살인 참사 피의자 안인득이었습니다.

“너 관리사무소 직원이지? 관리사무소에서 한 게 뭐가 있냐?”라는 안인득의 질문에 정 씨는 “아직 근무한 지가 얼마 안 돼 열심히 배우고 있습니다.”라고 답했습니다. 그러자 무언가가 정 씨의 얼굴을 덮쳤습니다. 어두워서 보이지 않았습니다. 주먹인 줄 알았습니다. 곧 정신을 차리자 얼굴에서 피가 뿜어져 나온 걸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제야 자신의 얼굴을 덮친 건 주먹이 아니라 흉기인 걸 알았습니다.

경찰이 도착했습니다. 경찰과 안인득의 대치가 벌어지자 정 씨는 흉기에 찔려 숨져가는 이웃을 살폈습니다. 흉기에 찔린 얼굴과 입에선 피가 계속 나왔지만, 주민들을 챙겨야 하는 게 그의 일이었습니다. 구조대원이 쓰러진 주민들을 모두 이송할 때까지 사건 현장을 뜰 수 없었습니다. 구조대원과 함께 피해자들을 챙겼습니다. 구조 차량이 모두 떠난 뒤 한 대가 되돌아왔습니다. 모든 피해 주민들이 병원으로 옮겨지고 나서야 마지막으로 구조 차량에 누울 수 있었습니다.

정 씨는 도망가고 싶었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딸이 찔렸다”라는 고함 소리가 계속 귀에 머물렀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 순간 자신이 할 수 있고 해야 하는 일이어서 했을 뿐이라고 했습니다.

#전치 20주 부상…얼굴 반쪽 마비
병원으로 옮겨지자 정신을 잃어갔습니다. 출혈이 심했습니다. 수혈을 받고서야 조금씩 정신이 돌아왔습니다. 수술을 받았습니다. 왼쪽 광대뼈를 흉기로 맞아 잇몸이 무너졌고 턱을 다쳤습니다. 얼굴 반쪽의 신경을 잃었습니다. 평생 완쾌가 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전치 20주. ‘좌측 광대뼈 및 상악골의 개방성 골절, 좌측 볼의 열린 상처, 아래턱 부위의 열린 상처’라는 공식 진단을 받았습니다.

한 번의 수술과 보름여 동안의 입원, 3주가량의 통원 치료가 이어졌습니다. 받아야 할 수술은 남아 있고 흉터 제거를 위한 성형수술도 받아야 합니다.

정 씨는 산업재해보험 요양급여를 신청했습니다. 하지만 주치의와 근로복지공단 담당의의 소견은 ‘취업요양’이었습니다. 얼굴을 다쳤기 때문에 일을 하면서 치료를 받을 수 있단 말이었습니다. 요양급여를 받을 수 없단 이야기입니다. 근로복지공단 진주지사에서 재심사 청구를 제안했습니다. 다행히 산재 재심사는 의사들의 소견을 따르지 않았습니다. 평균 월급의 70% 수준의 요양급여를 받을 수 있게 됐습니다. 그동안은 LH의 관리위탁업체인 정 씨의 소속회사로부터 위로금 명목으로 급여를 받아왔습니다. 치료비 역시 산재보험으로 해결했지만, 초기 요양급여를 신청하지 않아 아직 받지 못한 급여가 있는 상태입니다. 근로복지공단 측은 행정절차에 따라 미지급한 요양급여를 지급하겠다고 밝혔습니다.

사건 현장에서 수습을 돕는 정연섭 씨사건 현장에서 수습을 돕는 정연섭 씨

#트라우마에 멀어진 꿈…'의인'이지만 생계 걱정 처지
산재보험을 계속 받을 수 있지만 정 씨는 다시 일하고 싶었습니다. 지난 6월 3일부터 자진해 다시 아파트 관리사무소로 출근했습니다. 관리소장의 배려로 당직근무는 하지 않고 주간 근무를 했습니다. 그런데 지난 25일 무급 휴직에 들어가기로 했습니다. 정신적 트라우마 때문이었습니다. 복귀해 근무하면서 참사가 벌어진 아파트 건물로 들어갈 일이 있었습니다. 건물에 들어서자마자 숨이 턱 막혀왔습니다. 몸이 굳었고 어지러웠습니다. 구토가 나왔고 몸이 떨렸습니다. 더는 근무할 수 없게 된 이유입니다.

정 씨의 꿈은 아파트 관리원이었습니다. 식품 공장에서 일하다 꿈을 이루기 위해 전문대학에 입학해 전기설비 관련 자격증들을 취득했습니다.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해 대학교수 추천으로 LH의 아파트 관리 위탁업체에 계약직으로 취업했습니다. 근무 평가도 좋았습니다. 정 씨의 상사인 정경안 관리사무소장은 “적응도 잘하고 성격도 좋아 아끼던 직원이었다”며 “이렇게 다친 게 너무나 안타까워 LH에 특별채용도 제안해봤지만 쉽지 않을 것 같다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말했습니다.

정 씨는 정신과 전문의로부터 참사의 충격을 몸이 기억해 평생 트라우마를 안고 살 수밖에 없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참사가 빚어진 아파트뿐만 아니라 다른 아파트에서라도 관리원이란 꿈을 이루며 일할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습니다. 꿈이 아니더라도 생계를 위해 다른 일이라도 할 수 있을지 역시 장담할 수 없습니다. 정씨가 소속된 아파트 관리사무소는 정씨가 무급휴가에 들어가자 신입직원을 채용했습니다. 정씨가 빠지면 당직근무를 할 수 있는 직원이 고작 2명뿐이어서 불가피했습니다. 고작 취직 40일 만에 참사를 겪은 정 씨는 석 달 동안의 무급휴가를 마치면 사실상 실직 상태가 될 우려가 큽니다.

피해 주민들을 도우려다 자신도 흉기에 찔리는 피해자가 됐습니다. 피해자가 되고 나서도 피해 주민들을 도왔습니다. 그는 관리사무소 직원으로서 본분을 다했습니다. 그러나 산재보험 외엔 어떤 보상이나 도움도 못 받고 있습니다. 흉터 제거술 등의 비급여 항목 치료는 자비를 들여야 합니다.

정연섭 씨는 의인으로 칭찬받을 만한 일을 하고도 꿈을 계속 이어갈 수 있을지, 생계를 이어갈 수나 있을지 걱정하고 있습니다. 29살, 창창해야 할 앞날이 어두워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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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9-06-27 15:40:18
    취재K
화재경보음을 듣고 관리사무소 사무실을 나가고 있는 정연섭 씨

# 방화·살인 참사...현장지킨 관리사무소 막내 직원
지난 4월 17일 방화·살인 참사가 일어난 진주의 한 아파트 관리사무소.
당직 근무를 하던 관리사무소 막내 직원 29살 정연섭 씨는 새벽 4시가 지날 무렵 화재경보음을 듣습니다. 당직 매뉴얼에 따라 각 동 경비원들에게 위급상황을 알리는 무전을 보낸 뒤 불이 난 현장으로 부리나케 달려갔습니다.

아파트로 들어간 정 씨는 엘리베이터가 1층에 없자 계단을 통해 불이 난 4층으로 뛰어 올라갔습니다. 화재 현장을 확인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매뉴얼대로 4층 아파트 가스 밸브가 잠긴 걸 확인하곤 119와 112에 신고한 뒤 동료 근무자에게 비상연락을 돌렸습니다. 그 순간 갑자기 “딸이 찔렸다”라는 고함 소리를 들었습니다. 소리가 난 3층과 4층 사이의 계단으로 가자 한 남성이 양손에 흉기를 든 채 서 있었습니다. 방화·살인 참사 피의자 안인득이었습니다.

“너 관리사무소 직원이지? 관리사무소에서 한 게 뭐가 있냐?”라는 안인득의 질문에 정 씨는 “아직 근무한 지가 얼마 안 돼 열심히 배우고 있습니다.”라고 답했습니다. 그러자 무언가가 정 씨의 얼굴을 덮쳤습니다. 어두워서 보이지 않았습니다. 주먹인 줄 알았습니다. 곧 정신을 차리자 얼굴에서 피가 뿜어져 나온 걸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제야 자신의 얼굴을 덮친 건 주먹이 아니라 흉기인 걸 알았습니다.

경찰이 도착했습니다. 경찰과 안인득의 대치가 벌어지자 정 씨는 흉기에 찔려 숨져가는 이웃을 살폈습니다. 흉기에 찔린 얼굴과 입에선 피가 계속 나왔지만, 주민들을 챙겨야 하는 게 그의 일이었습니다. 구조대원이 쓰러진 주민들을 모두 이송할 때까지 사건 현장을 뜰 수 없었습니다. 구조대원과 함께 피해자들을 챙겼습니다. 구조 차량이 모두 떠난 뒤 한 대가 되돌아왔습니다. 모든 피해 주민들이 병원으로 옮겨지고 나서야 마지막으로 구조 차량에 누울 수 있었습니다.

정 씨는 도망가고 싶었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딸이 찔렸다”라는 고함 소리가 계속 귀에 머물렀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 순간 자신이 할 수 있고 해야 하는 일이어서 했을 뿐이라고 했습니다.

#전치 20주 부상…얼굴 반쪽 마비
병원으로 옮겨지자 정신을 잃어갔습니다. 출혈이 심했습니다. 수혈을 받고서야 조금씩 정신이 돌아왔습니다. 수술을 받았습니다. 왼쪽 광대뼈를 흉기로 맞아 잇몸이 무너졌고 턱을 다쳤습니다. 얼굴 반쪽의 신경을 잃었습니다. 평생 완쾌가 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전치 20주. ‘좌측 광대뼈 및 상악골의 개방성 골절, 좌측 볼의 열린 상처, 아래턱 부위의 열린 상처’라는 공식 진단을 받았습니다.

한 번의 수술과 보름여 동안의 입원, 3주가량의 통원 치료가 이어졌습니다. 받아야 할 수술은 남아 있고 흉터 제거를 위한 성형수술도 받아야 합니다.

정 씨는 산업재해보험 요양급여를 신청했습니다. 하지만 주치의와 근로복지공단 담당의의 소견은 ‘취업요양’이었습니다. 얼굴을 다쳤기 때문에 일을 하면서 치료를 받을 수 있단 말이었습니다. 요양급여를 받을 수 없단 이야기입니다. 근로복지공단 진주지사에서 재심사 청구를 제안했습니다. 다행히 산재 재심사는 의사들의 소견을 따르지 않았습니다. 평균 월급의 70% 수준의 요양급여를 받을 수 있게 됐습니다. 그동안은 LH의 관리위탁업체인 정 씨의 소속회사로부터 위로금 명목으로 급여를 받아왔습니다. 치료비 역시 산재보험으로 해결했지만, 초기 요양급여를 신청하지 않아 아직 받지 못한 급여가 있는 상태입니다. 근로복지공단 측은 행정절차에 따라 미지급한 요양급여를 지급하겠다고 밝혔습니다.

사건 현장에서 수습을 돕는 정연섭 씨
#트라우마에 멀어진 꿈…'의인'이지만 생계 걱정 처지
산재보험을 계속 받을 수 있지만 정 씨는 다시 일하고 싶었습니다. 지난 6월 3일부터 자진해 다시 아파트 관리사무소로 출근했습니다. 관리소장의 배려로 당직근무는 하지 않고 주간 근무를 했습니다. 그런데 지난 25일 무급 휴직에 들어가기로 했습니다. 정신적 트라우마 때문이었습니다. 복귀해 근무하면서 참사가 벌어진 아파트 건물로 들어갈 일이 있었습니다. 건물에 들어서자마자 숨이 턱 막혀왔습니다. 몸이 굳었고 어지러웠습니다. 구토가 나왔고 몸이 떨렸습니다. 더는 근무할 수 없게 된 이유입니다.

정 씨의 꿈은 아파트 관리원이었습니다. 식품 공장에서 일하다 꿈을 이루기 위해 전문대학에 입학해 전기설비 관련 자격증들을 취득했습니다.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해 대학교수 추천으로 LH의 아파트 관리 위탁업체에 계약직으로 취업했습니다. 근무 평가도 좋았습니다. 정 씨의 상사인 정경안 관리사무소장은 “적응도 잘하고 성격도 좋아 아끼던 직원이었다”며 “이렇게 다친 게 너무나 안타까워 LH에 특별채용도 제안해봤지만 쉽지 않을 것 같다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말했습니다.

정 씨는 정신과 전문의로부터 참사의 충격을 몸이 기억해 평생 트라우마를 안고 살 수밖에 없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참사가 빚어진 아파트뿐만 아니라 다른 아파트에서라도 관리원이란 꿈을 이루며 일할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습니다. 꿈이 아니더라도 생계를 위해 다른 일이라도 할 수 있을지 역시 장담할 수 없습니다. 정씨가 소속된 아파트 관리사무소는 정씨가 무급휴가에 들어가자 신입직원을 채용했습니다. 정씨가 빠지면 당직근무를 할 수 있는 직원이 고작 2명뿐이어서 불가피했습니다. 고작 취직 40일 만에 참사를 겪은 정 씨는 석 달 동안의 무급휴가를 마치면 사실상 실직 상태가 될 우려가 큽니다.

피해 주민들을 도우려다 자신도 흉기에 찔리는 피해자가 됐습니다. 피해자가 되고 나서도 피해 주민들을 도왔습니다. 그는 관리사무소 직원으로서 본분을 다했습니다. 그러나 산재보험 외엔 어떤 보상이나 도움도 못 받고 있습니다. 흉터 제거술 등의 비급여 항목 치료는 자비를 들여야 합니다.

정연섭 씨는 의인으로 칭찬받을 만한 일을 하고도 꿈을 계속 이어갈 수 있을지, 생계를 이어갈 수나 있을지 걱정하고 있습니다. 29살, 창창해야 할 앞날이 어두워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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